[만남] 한 사람에게 배운 그 모든 것 / 한동일, 신부·변호사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 깊은 여운을 준 한마디를 잊지 못하여 오래 마음에 담아두고, 그것으로 자기 삶의 밑거름으로 삼았다는 사람들이 있다. 가르치는 사람은 학생에게 그렇게 묵직한 울림을 줄 때 비로소 ‘참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헤아려보니 30년이란긴 세월 동안 공부를 해온 나에게도 무수한 선생님들이 계셨다. 그 가운데는 아쉽게도 나에게 상처로 남은 분도 있고, 반대로 살아가며 오랫동안 힘이 되신 분도 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서 그 모든 것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분도 있다. 그분은 로마에서 유학 중일 때 만났다. 

교황청립 라테란 대학교에서 수학 중일 때 만난 한나 알안 대법관님은 나에게 특별한 영적 스승이자 멘토이시다. 알파벳을 만든 페니키아인의 후손인 레바논 사람으로, 내 안에 ‘레바논’과 ‘동방 가톨릭교회’, 그리고 ‘로타 로마나’라는, 그때까지 잘 몰랐던 세계의 카테고리를 갖게 해주셨다. 유학 중 주로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나는, 후배가 방을 못 구해서 내 방을 그에게 주고 마로니타 기숙사를 찾았다. 처음엔 알안 대법관님이 단순히 기숙사 원장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한참 뒤에서야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의 대법관이자 사법연수원과 우르바노 대학에서 동방 교회법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나는 기숙사에서 아랍 학생들과 잘 지냈는데, 알안 원장님은 이런 내 모습에 안도하셨는지 다른 한국 학생까지 받아주셨다. 그리고 내가 잠시 한국에 귀국했다가 다시 로마로 돌아와 공부를 이어가야 했을 땐, 아예 당신의 방 바로 앞에 있는 방을 내주셨다. 거기서 내가 모르는 것을 하나부터 열까지 상세히 가르쳐 주셨고, 나에게 벌어지는 어려운 일이나 내가 포기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고민을 할 때면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알안 대법관님은 내가 석사와 박사 학위 과정 모두를 3년이라는 비교적 빠른 시간에 마치고 났을 때,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의 사법연수원 입학시험을 보라고 권고하셨다. 나는 “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언어의 벽이 높았다. 로타 로마나의 공식 언어는 라틴어다. 유럽어로 올라온 소송을 모두 라틴어로 옮겨 정리하고 판결문, 변론서 작성을 모두 라틴어로 해야 하는데, 실제 사건을 다루는 사법연수원도 마찬가지다. 입학시험에서 운 좋게 합격한다고 해도 연수원 3년 과정을 마친 연수생 중 최종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하는 비율은 5~6%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서유럽인 중에서도 교회법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시민법 변호사들이 아니면 접근조차 힘들다. 

하지만 알안 대법관님은 물러나지 않으시고 오랜 시간 나를 설득하셨다. 너는 할 수 있다고 격려하시며 당신이 공부했던 책까지 가져다주셨다. 사법연수원 입학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누구보다 기뻐하셨고, 최종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더 기뻐하셨다. 한국인, 동아시아인 가운데 누구도 가지 않은 길로 안내하며 나를 그대로 믿어주신 분. 그런 참 스승의 바람과 신뢰가 엄청난 자양분이 되어서 나는 그 어려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었다.

알안 대법관님이 무엇보다 내게 귀감이 되었던 건 제대로 공부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였다. 학문적인 지식은 더 말할 것도 없는 분이지만, 그분이 가진 고매하지만 소박한 인품과 따뜻한 성정은 그 지식을 더 빛나게 해주었다. 기숙사 관련 일도 직접 홀로 하시고, 기숙사에 묵던 사람이 고국으로 떠날 때 공항에서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바로 달려가서 직접 해결해주셨다. 그분의 그러한 모습은 ‘주교’라는 고위 성직자가 되신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단벌의 양복을 입고 늘 대중교통을 이용하셨다. 단순한 지식인이 아니라 최고의 지성인이셨다. 

나는 내 삶에서 그분을 만난 것이 가장 큰 은총이자 행운이었음을 안다. 그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내 삶은 다른 모습일 것이다.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라서만은 아니다. 지금보다 더 성숙하거나 조금은 거룩한 인간으로 나아가는데 나침반이 되어주신 분. 오늘도 나는 그분에게서 배운 학문과 삶과 사람에 대한 태도를 되짚어보며, 어제보다 나은 사람으로 살고자 한다.  

*1970년 서울 출생. 광주가톨릭대학교 학사,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 교회법학 석사 및 박사. 한국인 최초, 동아시아 최초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 저서로는 <교회법률 용어사전><로마법 수업><라틴어 수업><한동일의 공부법> 등 다수.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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