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난 手作] 손길과 마음길이 닿다 /황해봉, 인간문화재·화혜장(靴鞋匠) 

어쩌면 숙명이었을지도 모른다. 6대에 걸쳐 화혜장의 길을 걷고 있는 나의 삶이. 내 본적은 인사동인데, 과거 이 부근에는 궁궐 소속의 장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살고 계셨던 나의 할아버지(황한갑 선생, 중요무형문화재 37)고종황제의 적석(평상화)을 만드셨던 분인데,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런 할아버지가 작업에 열중하시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자랐다. 하지만 늘 일상 속에 녹아있는 익숙한 풍경으로 인식해서인지 그때는 이 길이 곧 내 길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어떠한 구체적인 확신도, 명확한 청사진도 그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여느 청년들처럼 부푼 꿈과 야망을 품은 풋풋한 청춘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마도 군 제대 무렵이었을 것이다. 어느덧 80을 넘기신 할아버지는 가업의 명맥이 끊어질 것을 우려하시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셨다. 그런 모습을 목도하면서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에는 뜨거운 무엇인가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래, 장남인 내가 가업을 잇자.’

이처럼 장남으로서 대대로 전해진 가업과 전통을 이어가야겠다는 사명감이 앞서다 보니 이를 지키려는 의지는 날로 강해졌다. 풀리지 않는 부분들이 있을 때면 즉각적으로 할아버지에게 여쭤보면서 바로바로 익혀나갔고, 이런 나를 할아버지는 항상 기특하게 여기셨다. 사실 그 당시 아버지는 직장생활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야 뒤늦게 이 일을 배우게 되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이수자의 신분으로, 아버지는 화장(靴匠) 전수자로 배움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보다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화장 종목은 폐지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할아버지는 1983년에 눈을 감으셨고, 나는 2003년에 무형문화재 11호 화혜장으로 지정받게 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화혜장은 조선 시대 전통 신을 만드는 장인으로, 신목이 있는 신발인 화()를 제작하는 화장과 그것이 없는 신발인 혜()를 제작하는 혜장을 합쳐서 명명되고 있다. 현재 나는 거의 모든 종류의 혜를 비롯해서 흑목화와 백목화도 만들고 있는, 전통 신에 있어서는 유일한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화혜장으로 걸어온 40년의 세월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시대의 변화로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사양길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명감 하나로 직업인으로서, 또 생활인으로서 버티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의 나는 늘 외롭고 쓸쓸했던 것 같다. 홀로 좁은 골방에 앉아 침묵으로 적막을 이겨내며 온종일 작업에만 몰두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 역시 두 아들을 이 일에 매진시키는 것을 거듭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큰아들은 사회생활을, 작은아들은 전수자인 아내와 함께 이수자로서 가업을 잇는 길을 선택하여 성실히 임하고 있다.

이처럼 당장은 명맥이 끊어질 염려가 없다고 하더라도 사실 앞으로가 문제다. 가업과 전통 계승이라는 자부심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앞서 말했듯이 그것만으로 버티기에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인(匠人)이란, 장인의 길이란 무엇일까. 정의할 수는 없어도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한길로 정진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물론 분야도 시대도 각각의 상황도 다르겠지만, 물질적인 가치보다는 본질적인 가치에 무게중심을 두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 아닐까. 소위 자본주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도, 설명되지도 않는 오래된 미래를 꿈꾸는 그런 사람 말이다.

오늘도 고운 수가 살포시 놓여있는 꽃신에는 한 땀 한 땀 열정이 담긴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오늘 만드는 신발은 내일 만드는 신발과 같을 수는 없다. 사람의 손길과 마음길이 닿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예의 길은 죽을 때까지 끝이 없는 것이다. 그 길을 나는 오늘도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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